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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인검사출신변호사 정부, 구금된 한국인 귀국 준비 착수…“미 측 원만히 협조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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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또또링2 댓글 0건 조회 0회 작성일 25-09-11 1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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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인검사출신변호사 한국 정부가 미국 이민 시설에 구금된 한국인 300여명을 귀국시키기 위한 준비 절차에 착수했다. 구금자 대다수가 수용 시설에 남아 체류 적법성을 다투는 대신 자진 출국을 선택할 것으로 전해져 한국행 전세기에 300여명 대부분이 탑승할 것으로 보인다.
조기중 워싱턴 총영사를 비롯한 외교부 현장대책반 관계자들은 8일(현지시간) 미 조지아주 포크스턴에 있는 이민세관단속국(ICE) 구금시설을 오전과 오후 두 차례 찾아 귀국을 위한 실무 준비를 진행했다.
조 총영사는 이날 오후 취재진에게 “안에 계신 분들을 다 뵙고 (전세기) 탑승에 필요한 준비를 했다”고 전했다. 오는 10일쯤으로 알려진 귀국 날짜에 대해서는 “(정부 공식) 발표를 기다려 달라”고 했다.
그는 “많은 인원을 한꺼번에 전세기에 태워 한국에 보내려면 여러 가지 해결해야 할 행정적, 기술적 상황들이 많다”면서 “미국 측에서 협조를 잘해줘서 지금까지는 그럭저럭 원만하게 진행해 오고 있다”고 전했다.
미 이민 당국의 외국인 번호(A-넘버) 부여 절차도 이날 중 완료될 예정이라고 조 총영사는 설명했다. 외국인 번호는 추방 절차 대상자 등에게 부여하는 것인데 이민 당국의 기록 관리에 필요한 것이어서 출국 전에 완료돼야 한다.
구금된 한국인 중 몇 명이 자진 출국에 동의하는지에 대해 조 총영사는 “다 한국에 가는 것을 바라신다”고 답했다. 잔류 희망자가 있는지는 “지금 말씀드릴 수 있는 사항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미 법무부 자료에 따르면 자진 출국은 추방 기록이 남지 않기 때문에 다시 비자를 신청해 미국에 입국하는 것이 가능하다. 대신 본인 비용으로 입국해 반드시 지정된 기간 내에 미국을 떠나야 한다. 다만 미국 이민법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최소 5년은 입국이 어려워질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이에 대해 조 총영사는 “자진 출국은 미국에 이미 있는 제도이고 5년 입국 제한 (규정)은 없다”고 설명했다.
한편 조현 외교부 장관은 미국 측과 이번 석방 문제 협의를 마무리하기 위해 이날 밤 워싱턴 인근 덜레스 국제공항을 통해 미국에 도착했다. 조 장관은 9일 마코 루비오 미 국무장관 겸 국가안보보좌관 직무대행과 만나 자진 출국하는 구금자들이 재입국 제한 등 불이익을 입지 않는 방안 등을 논의할 것으로 전망된다.
이찬진 금융감독원장은 8일 금융감독원 내 금융소비자보호처를 ‘금융소비자보호원(금소원)’으로 분리·신설하기로 한 정부 조직개편 방안에 “매우 안타깝게 생각한다”고 밝혔다.
이 원장은 이날 금감원 임직원들에게 보낸 메일에서 “금감원 임직원은 그간 금융소비자 보호 등을 위해 헌신적으로 일해왔던 만큼 개편 방안에 대해 걱정과 우려가 매우 클 것이라고 생각한다”며 “저를 포함한 경영진과 금감원 대다수 임직원은 감독체계 개편이 합리적으로 이뤄질 수 있도록 다방면으로 최선의 노력을 기울였으나 결과적으로 매우 안타깝게 생각한다”고 적었다.
이 원장은 “원장으로서 임직원 여러분이 느끼는 우려와 불안감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며 “앞으로 국회 논의 및 유관기관 협의 과정에 적극적으로 임하여 금감원·금소원의 기능과 역할 등 세부적인 사항을 꼼꼼하게 챙기겠다”고 했다.
그러면서 “금감원-금소원 간 인사 교류, 직원 처우 개선 등을 통해 여러분의 걱정이 최소화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며 “직원 의견 수렴을 위한 소통의 장도 빠른 시일 내 마련하겠다”고 약속했다.
정부의 조직개편 논의 단계부터 금소원 분리를 반대해온 금감원 노조는 이날 성명서를 내 “금소원을 별도 신설하는 것은 소비자보호에 역행하는 조치”라고 비판했다.
노조는 성명서에서 “금융사 건전성 감독과 소비자보호 기능은 유기적으로 연계되어야 제대로 작동한다”며 “이를 기계적으로 분리하면 감독 기능 간 충돌 등으로 혼란이 불가피하다”고 지적했다.
이어 “금감원 조직 분리는 개혁이 아닌 자리 나누기식 개편”이라며 “민간조직을 공공기관으로 지정하는 것은 감독 독립성 훼손”이라고 우려했다.
전날 정부와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은 고위당정협의회를 거쳐 조직개편 방안을 확정했다. 금융위원회는 금융감독위원회로 재편하고 금감위 산하에 금감원과 금소원을 공공기관으로 두는 것이 이번 금융감독 조직개편안의 골자다.
‘위대한 당나라 왕업을 여니…높은 황제의 포부 빛나도다…해와 달, 뭇별이 (당나라의) 만방을 두루 도네…우리 당나라 황제 밝게 비추리라.’(<삼국사기> ‘진덕여왕’조)
650년 신라 진덕여왕(재위 647~654)이 당나라 황제인 고종(649~683)에게 올린 ‘태평송’이다. 그 내용을 더 들여다보자.
“…(당나라가) 전쟁을 그치니 천하가 안정되고 문치를 닦아 대대로 잇게 했도다. 하늘의 뜻을 잘 받드니 은혜의 비가 내리고…깊은 어짊은 해와 달에 짝할 만 하고 시운(時運)을 어루만져 태평세월을 갈구하도다…”
손발이 오글거린다. 이게 다가 아니다. <삼국유사>는 “진덕여왕이 손수 비단을 짜서 그 위에 ‘태평송’을 수놓아 바쳤다”고 덧붙였다.
■손발이 오글오글…
이 ‘태평송’은 한시의 측면에서 당대 중국의 어떤 시에도 꿀리지 않을 명작으로 평가된다.
고려의 문장가 이규보(1169~1241)는 “신라 여왕의 태평시는…고고하고 웅혼하니 당나라 모든 저작에 비해도 우열을 가릴 수 없다…여왕이 썼다니 기이하다”(<백운소설>)고 평가했다. 그러나 ‘여왕이 쓴 시가 좋다’느니 하는 이야기는 중요치 않다. ‘아부로 가득찬 그 내용’이 핵심이다.
물론 ‘중국=천하의 중심’으로 여겼던 때였다.
그럼에도 한 나라(신라)의 국왕이 중국 황제에게 저렇게 저자세로 아부를 떨 필요가 있었을까.
한문학자 이가원(1917~2000)은 “우리 시가에 있어서 아유(阿諛·아부)문학의 효시”라 했다. 또 “‘태평송’이 빌미가 되어 사대모화의 불씨가 될 줄은 아무도 몰랐으니 외교 측면에서는 빛났지만 자주(自主)에는 씻지 못할 먹칠이 된 셈”(<한국한문학사>·1979)이라 했다.
그러나 “찬란한 시문인 ‘아부문학’으로 당나라 황제를 홀리는 게 당시 신라의 외교전술”(서수생 전 경북대 교수)이라는 평가도 있다. 신라가 아부외교로 당나라 황제의 마음을 샀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진덕여왕은 왜 당나라 황제를 위해 ‘아부송’을 불렀을까.
■김춘추의 외교참사
그 무렵(650) 삼국 및 국제정세를 살펴보자. 8년 전인 642년(선덕여왕 10)이었다. 이때 백제는 신라를 숨 쉴 틈없이 밀어붙인다.
7월 미후성 등 신라의 40여 개 성을 빼앗았다. 8월 고구려군과 연합한 백제군은 당항성(경기 화성)을 공격, ‘신라-당나라’의 소통로를 끊으려 했다. 이어 백제군이 신라 대야성(합천)까지 빼앗았다. 이때 대야성 도독인 이찬 품석과 부인 고타소랑(태종 무열왕 김춘추의 딸) 등이 죽었다.
대야성(합천)은 백제에서 신라로 가는 길목에 자리잡고 있었다. 642년 7~8월은 신라로서는 ‘충격과 공포’의 두 달이었다.
신라는 우선 고구려에 손을 내밀었다. 훗날 태종무열왕(재위 654~661)이 되는 이찬 김춘추(604∼661)이 고구려 특사를 자처한다.(643년 겨울)
백제군에게 딸 부부를 잃은 김춘추는 복수심에 불타 “내가 고구려에 가서 반드시 지원군을 얻어내겠다”고 다짐했다.
고구려 보장왕(642~668)을 알현한 김춘추는 강한 어조로 군사지원을 요청했다.
그러자 고구려 보장왕이 “본래 고구려 땅이었던 죽령(충북 단양~경북 영주 사이의 고개)의 서북 땅을 (고구려에) 돌려준다면 출병해준다”고 ‘조건부 지원’을 제안한다. 이에 김춘추는 발끈하며 대들었다.
“…대왕께서는…친선의 뜻은 없고 사신을 위협하여 땅을 돌려 줄 것만을 요구하시니…신은 죽을지언정 따를 수 없습니다.”
이런 오만불손한 김춘추의 태도에 화를 낸 보장왕은 그를 구금했다. 김춘추는 천신만고 끝에 귀국할 수 있었지만 신라의 대 고구려 외교는 참사로 끝났다.
■당태종의 폭탄발언
신라는 당나라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643년(선덕여왕 12) 1월~648년(진덕여왕 2) 겨울까지 8번이나 특사를 당나라에 보낸다.
그러나 중국과의 일방외교는 험난할 수밖에 없었다. 굴욕외교의 일화가 있다. 643년(선덕여왕 12) 9월 군사지원을 위한 특사 파견 때였다.
당 태종은 신라 사신에게 “신라를 위해 3가지를 제안하겠다”고 운을 뗐다.
“내(태종)가 당나라 군을 이끌고 요동(고구려)을 침공하면 고구려의 신라 포위가 풀릴 것이다. 이것이 첫번째 계책이다.”
그러나 당 태종은 이 계책의 한계도 언급했다. “1년 정도라면 몰라도 당나라군의 증원이 없다면 다시 신라가 위태로워진다”는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당나라의 ‘붉은 옷과 붉은 깃발’을 수천개 줄 수 있다. 그러면 백제·고구려군은 당나라 지원군인줄 착각하고 물러갈 것이다.”
태종은 이것이 두번째 계책이라 했다. 3번째 계책은 무엇일까. 태종은 “신라가 부인(선덕여왕)을 임금으로 삼아 이웃나라의 업신여김을 받고…침략 당하고 있다”고 전제했다.
그런 뒤 충격적인 제안을 내민다. “내가 당나라 종친 한 사람을 신라 왕으로 삼으려 한다. 군사를 보내서 그를 호위하려 한다. 나라가 안정되기를 기다려서 너희 스스로 지키는 일을 맡기려고 한다. 이것이 세번째 계책이다.”
■선덕여왕을 끌어내린다…
무슨 청천벽력인가. 신라 여왕(선덕여왕·632~647)을 끌어내리고, 당나라 황족을 신라왕으로 옹립하겠다는 얘기가 아닌가.
당 태종은 신라 특사에게 “잘 생각해 보라. 세가지 중 어떤 것을 따르겠느냐”고 물었다. 이 충격 발언에 특사는 “예”라고만 할 뿐 대답할 수 없었다. 이에 “당 태종이 신라 사신은 용렬하여 군사를 청하고 위급함을 알리러 올 만한 인재가 아님을 탄식했다”(<삼국사기>)고 전했다.
명색이 군사지원을 청하러 온 특사가 담대하게 대처하지 못하고 우물쭈물 한 것을 한심하게 여겼다는 뜻이다.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신라 특사는 당 태종의 트럼프식 ‘핵폭탄급 발언’을 예상하지 못한채 진땀을 흘렸음을 짐작할 수 있다.
사실 조짐은 있었다. 이미 ‘나비 없는 모란꽃’ 그림을 보내 남편이 없는 선덕여왕을 조롱한 당 태종이 아닌가. 신라 조정은 당 태종의 ‘선덕여왕 끌어내리기’ 충격요법에 대비하고 시뮬레이션 했어야 한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제2의 외교참사였다.
이후 동북아 정세는 또한번 요동쳤다. 2년 뒤(645년 5월) 당나라가 고구려를 침공했다. 신라는 3만 대군을 동원, 고구려의 배후에서 당나라를 돕는다. 그러나 결과는 좋지 않았다. 당 태종은 안시성 공격에 실패한 뒤 천신만고 끝에 회군했다. 신라는 어땠을까. 신라가 당나라군을 지원한 사이, 백제가 그 공백을 틈타 신라 7개 성을 빼앗았다. 존망의 위기에 빠진 신라로서는 유일한 동아줄인 당나라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신라의 마지막 승부수
신라는 마지막 승부수를 던졌다. 648년(진덕여왕 2) 김춘추와, 그의 아들 (김)문왕을 특사로 파견했다.
김춘추는 5년 전(643) 고구려와의 외교참사를 반면교사로 삼았다. 이번에는 조급하게 “구원병을 보내달라”고 재촉하지 않았다.
우선 태종의 허락을 얻어 당나라 국학(국자감)에 나가 석전(공자 등 유학 성인을 제사 지내는 의식)과 강론을 참관했다. 태종은 서두르지 않는 김춘추에게 호감을 나타냈다.
<삼국사기>는 “당 태종이 춘추의 용모가 영특하고 늠름함을 보고 후하게 대우했다”고 했다.
태종은 자신이 손수 지은 ‘비명’(비석에 쓴 글씨) 2장과 새로 편찬한 역사서(<진서>)를 하사했다.
그렇게 김춘추를 지켜본 태종은 연회 자리에서 사사로이 불러 금과 비단을 건네며 넌즈시 운을 뗐다.
“경(김춘추)은 마음에 품고 있는 것이 있는가.”(태종)
김춘추은 이때다 싶어 당나라의 군사지원이 절실함을 구구절절 강조했다. 그는 “당나라의 지원이 없으면 신라는 포로가 되고, 그 경우 당나라에 대한 조회도 더는 바랄 수 없을 것”이라 했다. 이에 태종은 “네 말이 옳다”면서 군사의 출정을 허락했다.
■23년 만에 드러난 밀약 내용
바야흐로 나·당 연합군이 결성된 것이다. 김춘추로서는 목적을 달성했지만 예서 그치지 않았다.
당 태종에게 “신라 관리의 관복 및 의례복을 고쳐 당나라 제도에 따르고 싶다”고 제안했다. 태종은 반색하면서 내전(황제와 왕후의 공간)에서 진귀한 옷을 꺼내어 김춘추와 사신일행에게 하사했다.
태종은 김춘추에게 당나라 관작(특진·당나라 정2품 문산관)을 내렸다. 또 3품 이상의 당나라 관리들에게 “김춘추를 위한 환송 연회를 베풀어주라”고 명했다. 김춘추는 떠나기 전에 한가지 더 제안했다.
“신의 아들(김문왕)을 폐하의 곁에서 숙위(황제 친위대)할 수 있도록 해주소서.”(김춘추)
태종은 흔쾌히 허락했다. ‘한껏 몸을 낮춰 황제의 환심을 산’ 신라와 김춘추의 외교가 빛을 발한 순간이었다.
그렇다면 당 태종이 신라에 원군을 파견하는 조건이 없었을까.
648년 당시에는 공개되지 않았던 ‘밀약’ 내용이 23년 뒤인 671년(문무왕 11) 밝혀진다. 삼국통일 후 나·당 간 관계에 최악으로 치닫자 극적으로 공개된 것이다.
당시 당나라 총관 설인귀(614~683)는 문무왕에게 “신라가 반역을 도모하면 멸망할 수 있다”는 내용의 협박편지를 보낸다.
이때 문무왕은 23년전(648) 나·당 연합 당시의 밀약내용을 까발린다.
“당시 당 태종은 김춘추를 만나 ‘백제와 고구려를 평정하면 평양 이남의 백제 땅은 모두 너희 신라에게 주겠다’고 했다”고 전했다.
■살기 위한 아부외교
당시 백제·고구려의 협공에 존망의 위기에 빠졌던 신라에게 648년 나·당 연합은 ‘천군만마’였다.
이에 신라는 관리의 의관(옷과 관)을 중국식으로 제도화했다. 진덕여왕은 기존의 독자 연호(태화·太和) 대신 당 고종(649~683)의 연호(영휘·永徽)를 사용했다. 바로 그럴 때 진덕여왕이 직접 짠 자수에 아부로 가득찬 ‘태평송’을 새겨 보낸 것이다.
물론 신라의 대당 외교를 ‘굴욕’으로 폄훼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시대에 무슨 ‘민족 개념’이 있었겠는가. 백제와 고구려는 신라를 들들 볶고, 결국 멸망의 길로 이끄는 나쁜 이웃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신라로서는 ‘살기 위해’ 대당 아부외교를 감수했던 것이다.
■주인(당나라)을 무는 개(신라)
그렇지만 그 결과는 어떠했을까. 7세기 당나라와 고구려, 백제, 신라가 어우러진 동북아 전쟁의 최종 승자는 신라였다.
즉 나·당 연합의 결과로 백제(660)와 고구려(668)를 격파했다. 648년의 밀약에 따르면 당나라는 평양 이남의 땅을 신라에 떼어 주어야 했다.
그러나 당나라는 고구려와 백제 고토는 물론 신라까지 집어삼킬 야욕을 노골화했다.
<삼국사기>는 “당나라군은 백제 멸망 직후 사비(부여)의 언덕에 진영을 설치해 신라를 침략할 계획을 세웠다”(‘열전 김유신’)고 전했다.
650년 극강의 아부외교를 펼친 신라였지만 이때만큼은 가만있지 않았다. 긴급 소집된 군신회의에서 김유신(595~673) 등이 강경대처를 주장한다.
“개(신라)는 주인(당나라)을 두려워하지만 주인이 그 다리를 밟으면 무는 법…지금이 물어야 할 때입니다.”
이 소식을 염탐한 당나라 소정방(592~667)은 ‘앗 뜨거워라!’ 하며 신라 침공 계획을 포기했다. 신라의 강경책에 당나라가 ‘움찔’했던 것이다.
■취리산 회맹의 전말
당나라는 ‘한반도 접수’의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 663년 4월 당나라는 신라를 계림도독부로 칭하고 문무왕에게 계림대도독의 벼슬을 내렸다.
아직 당나라의 힘이 필요했던 문무왕은 대놓고 반발할 수 없었다. 결국 4개월 뒤인 663년 8월 나·당 연합군은 백제 부흥군-왜 연합군과 백강(금강?) 전투에서 대승을 거뒀다. 백제 부흥운동은 실패로 돌아갔다. 당나라의 한반도 정책은 이 무렵 직접 통치 대신 간접 통치로 바뀐다.
신라는 물론 고구려와, 그리고 백제의 가열찬 독립의지까지 확인했기 때문이다. 당나라는 660년 당시 당나라에 끌려온 부여융(의자왕의 아들)을 웅진도독에 임명했다. 그러면서 당나라 칙사 유인원(생몰년 미상) 주도 아래 ‘취리산 회맹식’을 거행한다.(665년 8월)
이른바 유인원(당 특사)-계림도독(문무왕)-웅진도독(부여융)의 회맹이다. 그런데 회맹의 조약문이 심상치 않다.
“백제 부여융에게 조상 제사를 잇게 하고 옛 땅을 지키게 하려 한다. 신라와 사이좋게 지내고…당나라의 영원한 제후국으로 복종하라.”
■백제 고토는 백제에게…
신라에는 치욕이었지만 그때는 어쩔 수 없었다. 고구려가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당나라는 고구려 정벌전에서 신라군을 종 부리듯 동원했다.
일례로 661년 당나라는 “평양으로 군량미를 보내라”고 명했다. 이에 김유신 등이 수레 2000여대(쌀 4000섬·조 2만2000섬)를 끌고 적진을 뚫어 천신만고 끝에 평양에 도착했다. 그러나 군량미를 접수한 소정방은 “군사들이 피곤하다”면서 전투를 그치고 홀랑 귀국해버렸다.(<삼국사기>)
우여곡절 끝에 고구려까지 접수(668)한 당나라는 9도독부와 안동도호부를 설치했다. 동맹국이라는 신라를 철저히 깔아뭉갰다.
당나라로 개선한 대총관 이적(594~669)은 “신라에는 공을 세운 자가 아무도 없다”고 떠벌렸다.
설상가상으로 669년 당나라에 사절로 떠났다가 귀국(670)한 김흠순(599~680)이 경악할만한 지도 한 장을 가져왔다.
‘백제의 옛 땅을 백제인들에게 되돌려준다’는 ‘백제·고구려 멸망 후’ 동북아의 강역지도였다.
■당나라의 토사구팽
20년 전에는 ‘태평송’까지 지으며 아부했던 신라였다. 그러나 연합을 헌신짝처럼 버린 당나라에게 더는 ‘충성을 바칠 필요’가 없었다.
신라는 백제의 고토를 야금야금 먹어들어갔다. 고구려 부흥운동까지 은밀히 지원했다. 그러자 당나라는 앞서 밝혔듯 대총관 설인귀를 통해 신라에 “신라가 충성하지 않으면 사직을 끊겠다”는 장문의 협박 편지(671)를 보냈다. 이때 문무왕도 역시 장문의 답서로 응수했다.
문무왕은 일단 “…저의 간과 뇌를 들판에 발라서라도 황제의 은혜, 그 ‘만 분의 일’이라도 갚고자 했다”고 운을 뗀다. 문무왕은 한술 더떠 “태양이 비록 빛을 비춰주지 않지만 해바라기와 콩잎의 본심은 여전히 해를 향하는 마음을 품고 있다.”고까지 했다.
이 또한 지나친 아부로 비칠 수 있다. 그러나 ‘당나라가 먼저 배반했다’는 뜻의 ‘태양이 빛을 비춰주지 않는다’는 표현이 의미심장하다.
충성맹세로 시작한 문무왕의 답서는 이제 당나라를 원망하고, 규탄하는 내용으로 흘러간다.
“신라 백성은 풀뿌리도 먹지 못했는데, 당나라군은 양식이 남아 돌았다. 당나라군 1만명이 4년 동안 신라의 것을 먹고, 옷을 입었다. 당나라군의 가죽과 뼈는 비록 중국사람이지만 피와 살은 신라가 길러준 것이다.”(<삼국사기> ‘신라본기·문무왕조’)
문무왕의 피를 토하는 ‘토사구팽’ 외침이 계속된다.
“아! 두 나라 평정 전에는 (신라가) 혹독한 부림을 당하더니 들짐승(백제·고구려)이 없어지자 요리사(당나라)에게 쫓기는 신세가 되었구나.”
문무왕은 이 지경이 된 모든 책임은 당나라에 있으며, 앞으로 계속 신라를 핍박하면 더는 참을 수 없다고 선언한 것이다.
■진정한 국력은?
사실상 선전포고였다. 신라는 대놓고 백제 고토와 고토에 주둔하고 있던 당나라군을 공략했다.
마침내 675년(문무왕 15년) 9월 매소성(경기 연천) 전투에서 군마 3만여필을 획득하는 대첩을 거두었다. 676년 11월 기벌포(충남 서천 장항)에서 벌인 잇단 해전에서 22번 싸워 모두 승리했다. 이로써 나당전쟁은 신라의 완전한 승리로 끝난다.
648년 진덕여왕 때 맺은 신라-당나라 밀약을 깨고 한반도 전체를 접수하려 했던 당나라의 야욕은 이렇게 실패로 끝났다.
삼국 중 가장 약했던 신라는 이른바 ‘아부외교’로 당나라의 힘을 빌려 삼국 통일을 이룬 뒤 결국 당나라까지 몰아내는 개가를 올렸다. 외교에서 ‘아부’면 어떻고 ‘충성맹세’면 어떠한가. 나라를 위해, 백성(국민)을 위한 외교라면 ‘바짓가랑이 밑을 지난들’ 어떠랴.
지난 8월21일 미·일 정상회담을 앞둔 이 대통령은 “국가의 국력을 키워야 되겠다는 게 제 고민”이라고 했다. 국력이란 ‘경제력과 국방력’을 주로 따지지만 그보다 더한 요소가 있는 것 같다. 660년 백제 멸망 후 당나라 소정방은 “왜 내친 김에 신라까지 정복하지 못했느냐”고 힐책한 고종에게 이렇게 답했다. “신라는 임금이 어질고 백성을 사랑하며, 신하는 충심으로 나라를 섬기고…비록 작지만 도모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것이 ‘국력=외교력’의 버팀목이 아닐까. 이기환 히스토리텔러 lkh0745@naver.com
<참고자료>
김충희, ‘신라 진덕여왕의 태평송에 대한 재검토’, <한민족어문학> 80권 80호, 한민족어문학회 2018
서수생, ‘태평송(직금송)에 대하여’, <어문학> 11호, 한국어문학회, 19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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